5화. 지워진 숫자들 한글 타자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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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지워진 숫자들 전문
열한 번째 권 앞에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해가 어떤 해였는지 표지만 봐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무너진 해. 마흔둘에 실직해서 여덟 달을 집에 있던 해. 우리 부부의 이십이 년 중에 내가 제일 지우고 싶은 해.
가계부는 정직했다. 그해의 페이지들은 지출이 반으로 줄어 있었다. 외식 항목이 사라졌고, 아내의 미용실 항목이 사라졌고, 딸의 학원이 하나 줄었다. 숫자들이 그해의 우리 집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는 게 무서워졌다. 귀퉁이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 한숨이 적혀 있을까, 원망이 적혀 있을까.
"6월 22일. 쌀, 계란, 콩나물. 이 사람이 요즘 새벽마다 공원을 걷는다. 운동하는 척하는데 잠이 안 오는 거 안다. 콩나물국을 얼큰하게 끓여야겠다."
"8월 3일. 이 사람 이력서용 증명사진 8,000원. 사진관 아저씨한테 잘 나오게 해 달라고 두 번 말했다. 원래 잘생겼으니 걱정 없다."
"9월 10일. 지출 없음. 이 사람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콩나물국만 끓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국물에 말아서 넘기라고. 당신 잘못 아니라고 백 번을 말해도 안 들으니 국으로 먹인다."
나는 가계부를 덮고 한동안 천장을 봤다.
여덟 달 동안 나는 아내 보기가 미안해서 말수가 줄었고, 아내는 그런 나를 다그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게 무심함인 줄 알았다. 무심함이 아니었다. 아내는 위로를 국물에 말고, 응원을 증명사진에 담고, 걱정을 콩나물국 얼큰한 데에 숨겨 두는 사람이었다. 나만 못 읽은 것이다. 이십이 년짜리 문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