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스물세 권째 한글 타자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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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스물세 권째 전문
토요일 아침, 나는 새 가계부의 첫 장을 폈다.
볼펜을 들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뭘 적어야 하나. 가계부니까 지출부터 적는 게 맞겠지. 나는 어제와 오늘 쓴 돈을 적었다.
"콩나물 2,000원. 두부 1,500원. 멸치는 집에 있는 거 씀."
그리고 귀퉁이에, 아내가 이십이 년 동안 한 방식 그대로, 한 줄을 적었다.
"국을 끓여 봤다. 멸치 먼저, 콩나물 넣고 뚜껑 열지 말 것.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 맛이 안 난다. 22년 동안 얻어먹은 국에 뭐가 들어갔는지 이제 알았다. 그거는 마트에 안 판다."
적고 나서 나는 조금 오래 앉아 있었다. 쉰둘 먹은 남자가 가계부 앞에서 코끝이 매워지는 게 우스워서, 혼자 헛기침을 두 번 했다.
그다음 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지출 없음. 문갑 셋째 서랍에서 가계부 스물두 권을 봤다. 허락 없이 봐서 미안하다. 그런데 여보, 나는 이 서랍이 우리 집 금고인 걸 이제 알았다. 김밥 두 줄부터 다 읽었다. 나만 빈손으로 산 것 같아서, 늦었지만 나도 오늘부터 적는다. 스물세 권째는 내가 쓴다. 당신 것도 적어 두려고 한다. 두고두고 기억할 것."
두고두고 기억할 것. 아내의 문장을 훔쳐 썼다.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새 가계부를 문갑 셋째 서랍, 스물두 권 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쌀을 안쳤다. 두 그릇. 오후에는 갈치를 한 손 사 왔다. 싸운 것도 아닌데, 그냥, 갈치가 마중하게 하고 싶었다.